목적을 잃은 인생이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다 - 내 인생의 목적, 하나님
김남준 목사님의 『내 인생의 목적, 하나님』을 읽고 쓴 서평. 너무 많은 목적에 붙잡혀 사는 사람에게 방향을 되묻는 책, 로봇 비유로 시작하는 1장부터 '남은 고난'을 말하는 9장까지 읽으며 내 기도가 어떻게 바뀌었는지 적었다.
책 정보
“하나님을 내 계획의 유능한 조연으로 모셔 놓고 신앙이라 불렀던 시간을 들켰다.”
목차
목적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요즘 사람들은 목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조금만 들여다보면 정반대다. 목적이 없는 게 아니라 너무 많다. 돈은 더 벌고 싶고, 인정도 받고 싶고, 괜찮은 부모이고 싶고, 맡은 일에서 성과도 내고 싶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면 나쁠 게 하나도 없다.
문제는 그 좋은 것들 중 하나가 삶 전체를 쥐고 흔드는 자리로 올라설 때 생긴다. 가족을 향한 사랑이 도를 넘으면 자녀의 성적에 매달리게 되고, 책임감이 신 노릇을 하기 시작하면 실패 한 번에 사람이 무너진다. 사역마저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들의 평판을 얻는 통로로 슬쩍 바뀌어 있곤 한다.
김남준 목사님의 『내 인생의 목적, 하나님』은 정확히 그 지점을 파고든다. 2016년 생명의말씀사에서 나온 256쪽짜리 책이고, 하나님의 창조에서 출발해 인간의 타락과 그리스도의 구속, 신자의 성화를 지나 영원한 나라까지 한 줄로 이어 가며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묻는다.
목표 세우는 요령을 알려 주는 책은 아니다. 오히려 목표를 세우느라 분주한 사람을 붙들어 세워 놓고, 그 목표가 대체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되묻는다. 띠지에 적힌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사랑은 나뉘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이 이 책의 논지를 한 줄로 요약한다.
로봇이 아무리 사람을 닮아도
1장의 제목은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다. 저자는 여기서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은 어떤 존재이신가,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첫 질문에 대한 답으로 저자는 초월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지으셨지만 그 모든 것을 넘어 계신다. 그래서 인간을 비롯한 어떤 피조물도 그분과 견줄 수 없다. 여기서 뜻밖의 비유가 나온다. 과학이 발달해 사람이 하는 일을 대신하는 로봇을 만들었다고 상상해 보라고. 그 로봇이 아무리 사람과 흡사해도 로봇은 로봇이다.
2016년에 쓰인 비유인데 지금 읽으니 훨씬 얄궂게 들린다. 나는 매일 AI와 대화하며 일한다. 어떤 날은 나보다 정리를 잘하고, 어떤 날은 내가 놓친 걸 짚어 준다. 그럴수록 이 단락이 묘하게 걸린다. 얼마나 비슷하냐가 아니라 누가 누구를 지었느냐가 층위를 가른다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등급은 성능으로 정해지지 않는다.
어둠에 있었다는 말의 무게
7장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에서는 베드로전서 2장 9절을 붙들고 간다.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셨다는 구절이다.
저자는 “우리는 한때 어둠이었습니다"라고 쓴다. 어둠 속에 있었다가 아니라 어둠 자체였다는 표현이다. 그 상태를 이렇게 풀어 놓는다. 자신이 누구인지, 세상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고. 그래서 자기 생각에 좋아 보이는 대로 살았다고.
이어서 성경의 ‘빛’을 셋으로 나눈다. 자연의 햇빛, 윤리의 빛, 그리고 진리이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신학적인 빛. 본문이 말하는 빛은 세 번째다. 분류 자체는 교과서 같지만, 앞 단락을 읽고 나서 보면 다르게 읽힌다. 내가 지금 방향을 못 잡는 게 정보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빛의 종류를 착각해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계획에 축복을 얹어 달라는 기도
책을 덮고도 오래 남은 문장은 이것이다.
참된 인생의 가치는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며, 진정한 인생의 깊이는 성취가 아니라 의미입니다.
빨리 달린다는 사실만으로 제대로 살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남들보다 먼저 사다리를 올랐는데 꼭대기에서 보니 사다리가 엉뚱한 벽에 기대어 있었다면, 그 부지런함은 허무해진다. 이 대목에서 나는 그동안 ‘잘하고 있나’만 수없이 물었지 ‘누구를 위해 하고 있나’는 거의 묻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책의 뜻을 내 말로 옮겨 정리해 둔 문장이 넷 있다.
- 하나님은 내 계획을 이뤄 주는 수단이 아니라 내 삶이 향해야 할 종착지다.
- 하나님을 가장 사랑할 때라야 나 자신과 이웃도 제대로 사랑하게 된다.
- 고난은 목적이 사라졌다는 신호가 아니라, 잘못 끼워진 목적이 드러나는 시간일 수 있다.
- 구원받은 삶은 내가 중심인 인생에 하나님을 얹는 게 아니라, 중심 자체가 갈리는 일이다.
마지막 문장이 제일 아팠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조력자로 대하기는 얼마나 쉬운지. 계획은 이미 내가 다 세워 놓고, 거기에 보호와 축복만 얹어 달라고 기도한다. 겉보기엔 의지하는 모양새지만 한가운데엔 여전히 내가 앉아 있다. 이 책이 말하는 회심은 하나님을 내 이야기의 유능한 조연으로 모시는 일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의 큰 구원 이야기 속에서 작은 배역 하나를 맡았음을 깨닫는 사건이다.
혼자 구원받는 사람은 없다
5장은 좀 의외였다. 인생의 목적을 다루는 책인데 한가운데에 교회론이 들어앉아 있다.
저자의 논리는 이렇다. 신자는 홀로 예수님께 연합된 게 아니라 교회라는 큰 몸의 일부로 연합되어 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일도, 지금 누리는 구원의 감각도, 썩지 않을 몸을 덧입을 미래의 소망도 전부 몸의 한 지체로서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구원은 그리스도의 교회와 운명을 같이한다.
사진에 보이는 이 요약 페이지는 장마다 붙어 있다. 오른쪽 면에는 나눔 질문 세 개가 이어진다. 혼자 읽을 때는 건너뛰기 쉬운데, 소그룹으로 읽는다면 이 두 페이지만으로 모임 하나가 굴러간다.
개인적으로는 이 장 덕분에 ‘나의 목적’이라는 표현이 조금 무안해졌다. 인생의 방향을 고민할 때 나는 늘 단수로 생각했다. 내 소명, 내 부르심, 내 자리. 그런데 이 책은 목적이 처음부터 공동체의 언어였다고 말한다.
고난을 다루는 태도
9장 제목이 ‘목적이 있는 은혜’다. 여기서 저자는 고난을 둘로 가른다. 하나는 우리 구원을 위해 예수님이 홀로 지신 십자가의 고난. 이건 이미 끝났고, 거기에 사람이 더할 것은 한 톨도 없다고 못 박는다.
다른 하나가 골로새서 1장 24절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교회의 불완전한 것들을 다 걷어 내고 완성하실 그날까지 누군가는 감당해야 하는 몫. 우리는 그 몸에 접붙여진 상태로 그 고난에 참여한다.
이 구분이 실용적으로 느껴졌던 건, 고난을 만날 때 내가 늘 던지던 질문이 “내가 뭘 잘못했나"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질문을 지우지는 않되 유일한 선택지에서 내려놓게 한다. 어떤 고통은 벌도 아니고 신호도 아니고, 그냥 몸의 일부로 사는 데 딸려 오는 무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도 남는 의문
다만 읽는 내내 걸리는 게 있었다. 하나님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으라는 선언은 옳다. 그런데 깊은 우울 속에 있거나,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막막하거나, 오래 기도했는데 아무 응답도 없는 사람에게 이 명제는 너무 곧게 들릴 수 있다.
목적만 바로 세우면 모든 혼란이 풀린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믿음 좋은 사람도 길을 잃는다.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동시에 절망할 수도 있다. 예수님도 겟세마네에서 슬픔과 두려움을 감추지 않으셨다. 그러니 이 책의 메시지는 고통받는 사람에게 “목적이 잘못돼서 그런 것"이라고 들이대는 잣대가 아니라, 캄캄한 밤에도 손에 쥐고 있을 희미한 등불로 써야 한다. 표지 띠지에 찍힌 사진이 별빛 아래 홀로 선 등대인 게, 읽고 나니 꽤 어울린다.
계보 안에서 보면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은 그 오래된 고백을 한국 교회의 언어로 풀어 놓은 쪽에 가깝다.
존 파이퍼가 하나님을 기뻐하는 삶을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김남준은 그 기쁨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자기중심성이 어떻게 허물어져야 하는지를 훨씬 목회적으로 설명한다.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이 마음속 우상을 진단하는 데 집중한다면, 이 책은 우상이 빠져나간 자리를 누구로 채울지를 말한다.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은 삶의 목적을 몇 가지 실천 지침으로 줄여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가 말하는 변화는 습관 몇 개를 고치는 수준보다 깊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사랑을 낳고, 그 사랑이 욕망의 순서를 다시 짜고, 그제야 삶의 방향이 바뀐다는 구조다. 다만 특유의 단정적인 문체는 사람에 따라 무겁게 다가올 수 있다. 그래도 그 엄정함 안에는 정죄하려는 차가움보다 길 잃은 사람을 제자리로 돌려보내려는 목회자의 마음이 더 진하게 배어 있다.
질문이 바뀌는 경험
나도 할 일이 쌓일수록 기도는 짧아지고 성과를 굴리는 생각은 길어진다. 그러다 계획이 틀어지면 단순한 아쉬움을 넘어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듯 괴로워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달라진 건 하나다. 중요한 일을 시작하기 전에 “이게 잘되게 해 주세요"라고 먼저 말하는 대신, “이 일로 내가 무엇을 얻을까"가 아니라 “이 일로 하나님을 어떻게 기쁘시게 할까"를 먼저 묻게 됐다. 상황이 갑자기 좋아지진 않았다. 다만 실패를 바라보는 눈이 조금 헐거워졌다. 결과가 기대에 못 미쳐도 인생 전체가 망한 건 아니라는 여유가 생겼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물음은 얼마나 멀리 왔느냐가 아니다. 누구를 향해 가고 있느냐다. 하나님을 목적 삼는다는 건 야망도 개성도 다 반납하고 무색무취한 사람이 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창조주 안에서 내가 누구인지 찾아내고, 맡겨진 자리에서 가장 나답게 사는 길이다. 모든 걸 손에 넣어야 행복한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모든 걸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인생이 제자리를 찾는다.
총평
좋았던 점
-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는 오래된 말을 신학의 뼈대 위에 다시 세워 준다
- 창조 → 타락 → 구속 → 성화 → 영원한 나라까지 한 줄기로 꿰어, 인생의 목적이 취향 문제가 아님을 보여 준다
- 각 장 끝의 ‘한눈에 보는’ 요약과 ‘나눔’ 질문이 있어 혼자 읽어도, 소그룹으로 읽어도 걸리는 데가 없다
- 고난을 ‘목적이 사라진 증거’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참여하는 자리로 읽어 낸다
아쉬운 점
- 문체가 단정적이다. 설교를 그대로 옮긴 듯한 어조라 사람에 따라 숨이 막힐 수 있다
- 깊은 우울이나 생계의 압박 한가운데 있는 사람에게는 명제가 너무 곧게 들릴 수 있다
- 새로운 통찰보다 정통 교리의 재확인에 가깝다. 신선함을 기대하면 밋밋하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열심히 사는데 이상하게 공허한 사람
- 목표를 이뤘는데 기쁨이 사흘도 못 가 본 적 있는 사람
- 신앙과 일상이 따로 움직인다고 느끼는 신자
- 인생의 중간 지점에서 ‘앞으로 뭘 더 이뤄야 하지?‘를 붙들고 있는 사람
한 줄로 남기면
“하나님을 내 계획의 유능한 조연으로 모셔 놓고 신앙이라 불렀던 시간을 들켰다.”
자주 묻는 질문
신앙이 없어도 읽을 만한가?
읽기 어려운 편인가?
팀 켈러의 『내가 만든 신』과 어떻게 다른가?
소그룹 교재로 쓸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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