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왕좌에서 쫓겨났다 -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
존 오웬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를 읽고 정리한 서평. 죄가 '법'으로 남아 지성과 정서와 의지를 어떻게 무너뜨리는지, 죄가 가장 적게 느껴질 때 왜 가장 강한지, 그리고 이 책이 끝내 데려가는 자리가 어디인지 밑줄 그은 문장들과 함께 적었다.
책 정보
“죄가 조용해진 것과 죄가 약해진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목차
왕좌에서 끌려 내려왔지만, 성 안에는 남아 있다
책장에 꽂아 두고 몇 번을 미루다 결국 펼쳤다. 표지에는 가발을 쓴 17세기 사람의 초상이 있고, 그 아래 ‘On Indwelling Sin in Believers’라는 원제가 흘림체로 적혀 있다. 존 오웬 전집의 첫 권. 두께보다 제목이 더 부담스러웠다. 신자 안에 죄가 있다는 말을 굳이 한 권 분량으로 들어야 하나 싶었다.
김남준 목사가 오웬을 오래 붙들고 읽어 온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전집을 통독하고, 그 신학으로 강단에 서 온 목회자다. 나에게 이 책을 권한 것도 그의 설교였다. 지루하고 집요해서 요즘 사람에게는 맞지 않는 옷처럼 보이는 청교도 신학이, 누군가의 손을 거쳐 오면 갑자기 오늘 아침 내 마음 이야기가 된다.
책의 출발점은 로마서 7장 21절이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바울은 선을 원하면서 자기 안에서 악을 발견했다. 오웬은 여기서 죄를 실수나 일시적 충동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죄를 ‘법’이라 부른다. 법에는 방향이 있고 지속적인 힘이 있다. 신자 안에 남은 죄도 그렇다. 어쩌다 한두 번 튀어나왔다 사라지는 흔적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하나님에게서 조금씩 밀어내는 내적 원리다.
이 책의 뼈대는 한 문장으로 줄일 수 있다. 죄가 남아 있다는 사실과 죄가 지배한다는 사실은 다르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죄의 통치에서 벗어났지만, 죄의 존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것은 아니다. 죄는 왕좌에서 끌려 내려왔을 뿐 여전히 성 안에 숨어 있는 반란군이다. 더는 합법적인 주인이 아니지만, 틈만 보이면 다시 권력을 쥐려 든다.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것은 무흠함이 아니다
1부에서 오웬은 그렇다면 신자와 신자 아닌 사람이 무엇으로 갈라지느냐를 다룬다. 죄를 짓느냐 안 짓느냐로 나누지 않는다. 그는 헬라어까지 끌어와 ‘죄를 짓는다’는 말이 죄와 거래하며 그것을 자기 업으로 삼는다는 뜻임을 밝히고, 신자에게는 은혜로 말미암아 선을 행하기 원하는 지속적이고 통상적인 주도적 의지가 있다고 못 박는다.
이 대목에 유독 밑줄이 많이 남았다. 불신자도 죄를 피하려 애쓴다. 다만 그 힘의 출처가 다르다. 오웬은 그것을 ‘본성의 빛과 양심’이라 부른다. 사회적 체면, 손해 계산, 타고난 도덕감각. 그런 것들이 걷히면 언제든 다시 흘러간다. 반면 신자 안에는 넘어지고 나서도 다시 선 쪽으로 몸을 돌리는 성향이 남아 있다. 나를 안심시킨 건 무흠함이 아니라 이 방향성이었다. 넘어진 뒤에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 그 불편함 자체가 은혜가 일하고 있다는 신호일 수 있다는 이야기.
마음이라는 고장 난 기계
3부에 들어가면 오웬은 사람의 내면을 해부대에 올린다. 원래 지성과 의지와 정서는 한 몸처럼 움직이도록 지어졌다는 것이다. 지성이 하나님께 복종하면 나머지 기능이 그 아래에서 질서 있게 돌아간다. 그런데 지성이 죄로 뒤틀리자 나머지도 전부 어긋났다. 의지는 지성이 알려 준 선을 택하지 않고, 정서는 의지가 택한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여기서 가장 무서운 문장이 나온다. 마음은 금방 변하기 때문에 아무도 마음속에서 무엇이 나올지 예상할 수 없다. 불길처럼 뜨겁게 타오르다가도 차갑게 식고, 아주 약하게 굴다가 완강해진다. 어제 눈물로 결단한 사람이 오늘 아침 똑같은 자리에서 무너지는 이유를 이보다 정확하게 설명한 문장을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오웬은 그 뒤틀림의 주된 거처를 찍는다. 정서다.
죄는 지성을 정면으로 공격하지 않는다. 먼저 정서를 헝클어 놓고, 그 헝클어진 정서로 지성을 흐린다. 감정이 흔들린 자리에 요새를 짓는 셈이다. 골로새서 3장 5절의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에서 지체는 팔다리가 아니라 우리의 정서를 가리킨다는 해석도 그래서 나온다. 은혜가 영혼을 차지한 뒤에도 죄의 잔재가 주로 웅크리고 있는 곳이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 페이지에 클립을 물려 둔 이유가 있다. 나는 오랫동안 신앙을 지식의 문제로 다뤘다. 옳은 것을 알면 옳게 산다고 믿었다. 그런데 정작 무너질 때는 몰라서가 아니었다. 알면서도 그쪽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져서였다.
조용한 무너짐
가장 서늘했던 진단은 따로 있다. 죄는 가장 적게 느껴질 때 가장 강력하다는 말.
신앙이 무너지는 순간에는 스스로 심각하다고 느낄 것 같지만, 실제로는 반대다. 마음이 무뎌지면 죄책감부터 먼저 약해진다. 기도를 건너뛰어도 아무렇지 않고,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교만을 소신이라 부른다. 죄의 힘이 빠져서 평온한 게 아니라 양심이 그 소음에 익숙해져 조용해진 것일 수 있다.
오웬은 이 무뎌짐을 ‘영적 게으름’이라는 이름으로 아주 구체적으로 쪼갠다.
의무를 마지못해 감당하는 것, 묵상과 기도를 회복하는 데 허약하고 무기력한 것, 난관을 미리 걱정하다 아예 손을 놓아 버리는 것. 잠언 26장 14절을 인용한 비유가 특히 아팠다. 문짝이 돌쩌귀를 따라 도는 것처럼 게으른 자는 침상에서 돈다는 말. 위아래로 움직이긴 하는데 제자리다. 오늘 여기 있었다면 내년에도 그곳에 있다. 노력은 하는데 소득이 없고, 언제나 시작만 있고 끝이 없다.
읽다가 잠깐 책을 덮었다. 몇 년째 같은 결심을 반복하면서 그걸 ‘노력하고 있다’로 계산해 온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화를 낸 진짜 이유
돌아보면 나는 늘 행동이 터진 다음에야 문제를 알아차렸다. 목소리를 높이고 나서는 상대의 태도가 무례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웬을 따라 한 겹 안으로 들어가 보니, 그 밑에는 내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집착이 깔려 있었다. 옳은 말을 했다는 이유로 거친 태도를 정당화한 적도 많다. 진리를 지킨다고 여겼지만 실제로 지키고 있던 건 자존심이었다.
죄는 종종 선한 행동 속으로 숨어든다. 봉사하면서 칭찬을 기다리고, 충고하면서 우월감을 누리고, 바른 교리를 말하면서 사람을 내려다본다. 겉만 보면 흠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중심에 있다면 죄는 이미 깊이 개입해 있다. 오웬이 죄의 ‘행위’보다 그 배후의 성향과 힘을 그토록 집요하게 파헤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파헤쳐야 하나
솔직히 중간에 반발도 들었다. 사람 속을 이렇게까지 샅샅이 뒤져야 할까. 계속 자기 동기를 의심하다 보면 신앙이 과도한 자기검열로 변질되지 않을까. 무엇을 해도 숨은 교만이 있을 것 같고 선행조차 순수하지 않다고 판정한다면, 결국 아무것도 못 하게 된다. 청교도식 성찰이 복음의 자유보다 죄책감을 더 크게 키우는 위험은 분명히 있다.
책의 뒷부분이 그 우려에 답한다. 오웬은 진단에서 멈추지 않는다.
은혜 언약 안에는 죄를 물리치기에 충분한 양식이 마련되어 있고, 복음의 말씀과 모든 규례는 바로 그 목적을 위해 주어졌다는 것. 말씀을 전하는 직분자를 교회에 세우신 이유도 성도의 쇠퇴와 타락을 막고 온전함으로 이끌기 위해서다. 죄를 그토록 깊이 들여다보게 한 것은 절망의 바닥에 머무르라는 게 아니라, 자기 힘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십자가로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진단만 챙기고 처방을 놓치면 오웬을 절반만 읽은 셈이 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 기억과 욕망을 따라가며 내면의 굴곡을 이야기로 보여 준다면, 오웬은 영혼을 수술대에 올려놓고 죄의 동선을 논리로 관찰한다. 김남준의 『죄와 은혜의 지배』와 나란히 읽어도 좋다. 오웬이 내재하는 죄의 구조를 정밀하게 그려 낸다면, 그쪽은 죄의 지배와 은혜의 통치를 오늘의 생활에 더 가깝게 붙여 놓는다.
남은 것
이 책을 덮고 생긴 가장 현실적인 변화는, 죄를 마지막 단계에서만 다루지 않게 된 것이다. 말로 화를 터뜨리기 전에 마음속에서 이미 무엇을 허락하고 있었는지 살피게 됐다. 질투나 미움이 올라올 때 단번에 없애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그럴듯한 이유를 붙여 두둔하지 않으려고 한다. 싸움이란 유혹을 전혀 느끼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그 유혹을 내 편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라는 것도 배웠다.
문장은 쉽지 않다. 논증이 돌고 돌며 한 주제를 여러 방향에서 파고들어 빠르게 넘기기 어렵다. 그래도 반복되는 실패에 지친 사람, 성화를 인격 수양쯤으로 여겨 온 사람, 사람의 마음을 깊이 알아야 하는 자리에 선 사람에게는 값이 충분한 책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신자는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죄와 평화협정을 맺지 않는 사람이다. 넘어질 수는 있어도 그것을 정상이라 부르지 않고, 질 수는 있어도 무기를 내려놓지 않는다. 내 안의 어둠을 발견할수록 자기 가능성은 줄어들고 그리스도의 은혜는 커진다. 불편하지만, 그래서 반드시 통과해야 하는 책이다.
총평
좋았던 점
- 죄가 남아 있는 것과 죄가 지배하는 것을 갈라 놓는다 — 이 한 구분이 신앙생활의 절망과 방심을 동시에 막아 준다
- 죄를 행동이 아니라 지성·정서·의지를 타고 흐르는 원리로 해부한다
- “죄는 가장 적게 느껴질 때 가장 강하다” — 평온함을 성숙으로 착각하던 자리를 정확히 찌른다
- 진단에서 멈추지 않고 은혜의 언약과 복음의 규례라는 처방까지 데려간다
아쉬운 점
- 같은 주제를 여러 각도에서 반복해 파고들기 때문에 속도를 내며 읽기 어렵다
- 17세기 논증 문체라 문장이 길고, 한 문단을 두세 번 되짚어야 할 때가 많다
- 자기 동기를 계속 의심하다 보면 자칫 과도한 자기검열로 흐를 위험이 있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회개했는데도 같은 잘못을 반복하며 자기 믿음을 의심하는 사람
- 성화를 인격 수양이나 습관 교정 정도로 여겨 온 사람
- 사람 마음의 작동 방식을 깊이 이해해야 하는 목회자와 신학생
- 청교도 신학을 원전으로 한 권쯤 통과해 보고 싶은 독자
한 줄로 남기면
“죄가 조용해진 것과 죄가 약해진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자주 묻는 질문
신학 배경이 없어도 읽을 수 있나?
이 책을 읽으면 죄책감만 커지는 것 아닌가?
같이 읽으면 좋은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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