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는가, 하나님이 필요한가 - 신학실종
데이비드 웰스의 『신학실종』을 읽으며 교회의 성장과 개인의 위로 뒤로 밀려난 진리의 자리를 돌아봤다. 설교에서 내게 유익한 말부터 찾던 습관, 과거의 교회를 바라보는 저자에 대한 아쉬움, 성경을 읽을 때 달라진 질문을 담았다.
책 정보
“교회를 비판하는 책인 줄 알았는데, 설교에서 내게 필요한 말만 고르던 습관부터 돌아보게 됐다.”
『신학실종』이라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는 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덜 가르치게 됐다는 이야기인 줄 알았다. 신학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책이겠거니 했다. 읽어 보니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가까운 문제를 건드리고 있었다.
설교를 듣고 나서 나는 무엇부터 생각하는가. 하나님에 대해 무엇을 배웠는가, 아니면 오늘 내 마음이 좀 나아졌는가.
책장을 넘기다 말고 이 질문 앞에 오래 머물렀다.
표지에는 이 책을 두고 ‘복음주의자들의 놀이터에 던져진 폭탄’이라는 표현이 적혀 있다. 읽기 전에는 조금 과한 홍보 문구처럼 보였다. 그런데 웰스가 누구를 향해 질문하는지 알고 나면 그 표현을 이해하게 된다.
그의 비판은 성경을 믿고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향한다. 믿음을 버렸다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에게, 정말 그 믿음이 교회를 움직이고 있느냐고 묻는다.
원제인 No Place for Truth를 그대로 풀면 ‘진리가 설 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교회 안에서 진리가 설 자리를 잃는다니 이상한 말이다. 성경도 있고, 설교도 있고, 신앙고백도 있는데 무엇이 사라졌다는 걸까.
책을 읽으며 그 모순이 조금씩 이해됐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진리에 따라 판단하는 것은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었다.
서론 25쪽에서 웰스는 복음주의 교회가 신학적 무지 속으로 빠져드는 모습을 지켜봤다고 쓴다. 더 불편한 대목은 그다음이다. 그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자신이 성공을 향해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잘되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오히려 물을 수 없게 되는 질문이 있다. 사람이 모이고,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반응도 좋다면 굳이 무엇이 잘못됐는지 따져야 할 이유를 느끼기 어렵다.
웰스는 바로 그때 질문을 꺼낸다. 우리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것의 기준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책에서 말하는 신학은 어려운 용어를 얼마나 많이 아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삼위일체나 칭의, 성화라는 말을 설교에 자주 넣는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다. 내가 이해한 웰스의 관심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실제로 삶을 해석하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고 있느냐는 데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질문의 순서가 바뀐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보다 내 문제가 어떻게 해결될지가 급해진다. 교회가 무엇을 믿고 가르치는지보다 얼마나 성장했는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목회자의 역할이 달라진다는 진단도 이 흐름 속에서 읽혔다. 말씀을 맡은 사람에게 상담가와 조직 관리자, 동기부여자의 역할이 점점 더 크게 요구된다. 교회는 사람들의 필요를 파악해 만족을 제공하고, 성도는 자신에게 맞는 서비스를 찾아 움직인다.
물론 사람을 돌보고 공동체를 잘 운영하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그 필요가 목회의 방향까지 결정하기 시작할 때, 말씀은 사람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데 동원되기 쉽다.
여기까지 읽으며 교회의 문제라고만 생각할 수는 없었다. 나도 설교를 들으면서 “오늘 말씀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나?”부터 따질 때가 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좋은 말씀을 들었다고 느끼고, 불편한 대목은 오래 붙들지 않은 채 지나가기도 한다.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야 자연스럽다. 하지만 내가 듣고 싶은 말만 남긴다면, 나를 책망하고 내 생각을 고치는 말씀은 언제 들을 수 있을까.
2부 목차의 표현이 유독 선명하게 다가온 것도 그래서였다. 신학이 ‘중심에서 변두리로 쫓겨남’. 자취를 감춘 게 아니라 자리가 바뀌었다는 말이다.
내게 이 책에서 가장 무서웠던 생각은 교회가 진리를 공식적으로 부정하지 않고도 진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사도신경을 그대로 고백하고 십자가를 계속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성장, 효율, 이미지, 사람들의 만족이 앞선다면 고백한 내용은 실제로 얼마나 힘을 갖고 있는 걸까.
교회 밖의 잣대가 안으로 들어오는 과정은 생각보다 조용하다.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이유로 좋은 사역이라 여기고, 반응이 뜨겁다는 이유로 하나님이 기뻐하셨으리라 짐작한다. 그 사이 무엇을 전했는지, 어떤 삶으로 이끌었는지는 뒤로 밀린다.
이 대목에서 나도 숫자를 얼마나 편리한 판단 기준으로 사용했는지 돌아봤다. 눈에 보이는 결과는 설명하기 쉽고 비교하기도 좋다. 반면 충실함이나 오래 견디는 믿음은 단번에 드러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측정하기 쉬운 쪽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 텐데 말이다.
웰스는 이런 변화를 교회 내부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는다. 현대인이 진리를 바라보는 태도, 개인의 경험과 필요를 우선하는 문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10쪽에는 철학의 목적이 실용적이거나 치료적인 방향으로 기울었다는 그의 진단이 나온다. 무엇이 참인지 묻던 자리에 무엇이 쓸모 있고 나를 편하게 하는지 묻는 태도가 들어서는 흐름이다. 이 부분을 읽으니 앞서 나온 목회자의 역할 변화도 따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었다.
오늘의 내 독서 습관과 영상 시청 방식도 떠올랐다. 짧은 묵상이나 설교를 보다가 마음에 와닿는 문장 하나를 건지면 다음 영상으로 넘어갈 때가 있다. 앞뒤 논증을 따라가기보다 지금 필요한 위로를 찾는다.
그러니 교회가 사람들의 취향을 따라간다고 비판하면서, 정작 나는 내 취향에 맞춰 말씀을 골라 듣고 있었던 셈이다.
이 책을 읽고 성경 앞에서 질문 하나를 먼저 해보게 됐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고 말하는가?”
전에는 지금 내 상황에 적용할 말부터 찾았다면, 이제는 그 적용을 조금 늦춰 보려 한다. 내 기분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판단하기 전에, 본문이 말하는 하나님을 먼저 알아보자는 것이다.
이를테면 고난에 관한 말씀을 읽을 때도 그렇다. 문제를 빨리 해결받는 데만 관심을 두면 하나님을 문제 해결사처럼 대하기 쉽다. 이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물으면, 당장 이해되지 않는 현실과 함께 그분의 선하심과 내 이해의 한계도 생각하게 된다.
질문 하나 바꿨다고 고난이 쉬워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답을 재촉하는 나 자신에게서 잠시 눈을 돌릴 수는 있다. 내게는 그 작은 변화가 신학의 쓸모를 설명하는 어떤 말보다 실감 났다.
172쪽에서 웰스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지키고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을 강조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교리를 신앙에 덧붙이는 설명 정도로 생각해서는 안 되겠다고 느꼈다. 무엇을 믿는지 말할 수 없다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도 모호해진다.
흔히 신학에는 관심 없고 성경만 믿으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성경을 읽는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 죄와 구원을 어떤 관계로 이해하는지에 따라 같은 현실도 다르게 보인다.
이것은 책을 읽으며 내가 정리하게 된 생각이다. 신학을 의식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신학 없이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가진 생각을 성경의 가르침과 구별하지 못한 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렇다고 신학책을 많이 읽으면 저절로 나아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교리 지식으로 남의 오류는 잘 찾아내면서 자기 삶은 돌아보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나님을 알고 싶다는 마음이 빠지면, 신학 역시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도구가 되기 쉽다.
그 점에서 이 책을 다른 교회를 비판할 근거로만 읽는다면 중요한 질문을 놓치게 된다. 내 기도와 선택을 움직이는 하나님 이해는 어떤 모습인가. 나는 무엇을 믿기에 돈과 성공을 이렇게 바라보고, 실패 앞에서 이렇게 반응하는가.
다만 웰스의 분석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끝까지 남는 아쉬움이 있었다. 과거의 교회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217쪽에서는 교회의 오랜 신학적 대화를 이어가는 사람들과 새로운 관심사를 좇는 복음주의 사이의 긴장이 드러난다. 신앙의 역사와 단절된 채 유행만 따라가는 모습을 경계하는 데는 동의한다. 그래도 읽다 보면 과거의 고백적 개신교를 향한 향수가 꽤 강하게 느껴진다.
과연 과거의 교회는 지금보다 그렇게 건강했을까.
교회의 권력욕과 위선, 자기중심성은 현대 문화가 등장하기 전에도 있었다. 변화의 원인을 바깥에서만 찾으면 교회 안에 오래 자리 잡고 있던 욕망이 흐려질 수 있다. 내게는 현대화가 새로운 죄를 만들었다기보다, 이미 있던 욕망에 새로운 수단과 표현 방식을 제공했다고 보는 편이 더 설득력 있었다.
종교개혁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이 질문을 놓고 싶지 않았다. 232쪽에서 웰스는 개혁자들이 구원의 근거를 인간이나 교회 제도에 두지 않고 성령과 말씀의 역사에서 찾았다고 설명한다. 이 주장을 오늘 다시 읽는 의미는 과거의 교회 형태를 그대로 되살리는 데 있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무엇에 기대고 있는지 묻는 데 더 가까울 것이다. 익숙한 전통인가, 뛰어난 목회자인가, 성공한 프로그램인가. 하나님을 신뢰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안심하는 근거는 다른 곳에 두고 있지는 않은가.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다. 문화사회학과 교회사, 신학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야 하고, 미국 복음주의의 배경이 낯설면 멀게 느껴지는 대목도 있다. 신앙생활을 막 시작한 사람에게 첫 책으로 건네고 싶지는 않다.
대신 교회 생활에 익숙해졌는데 어느 순간 설교와 프로그램이 비슷하게 느껴지는 사람, 무엇을 기준으로 사역을 평가해야 할지 고민하는 목회자와 리더, 자신의 믿음을 한 번쯤 점검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읽고 나서 많이 배웠다는 만족감보다 쉽게 넘길 수 없는 질문이 남았다. 그 질문은 다른 교회나 목회자를 향할 때보다 나 자신에게 돌아올 때 훨씬 불편했다.
내 신앙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계신가, 아니면 하나님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은 내가 있는가.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을 지워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을 수 있는지, 듣기 좋은 말이 아닐 때에도 말씀 앞에 머물 수 있는지는 물어야 했다.
『신학실종』을 읽고 내가 당장 바꿔 보려는 것은 거창하지 않다. 설교를 듣고 유익했는지 평하기 전에 무엇을 들었는지 돌아보는 것. 성경에서 내 상황에 맞는 문장을 찾기 전에 하나님이 어떤 분으로 드러나는지 살피는 것. 불편한 말씀을 만나면 다음으로 넘어가기 전에 조금 더 머무는 것.
웰스는 교회에서 밀려난 신학의 자리를 묻는다. 나는 책을 덮고, 내게 필요한 말만 찾느라 정작 듣지 못한 말씀은 없었는지 생각했다.
총평
좋았던 점
- 진리를 고백하면서도 실제 판단에서는 밀어낼 수 있다는 교회의 모순을 드러낸다
- 현대 문화와 개인주의가 신앙의 모습을 어떻게 바꾸는지 깊이 살핀다
- 교회에 대한 비판을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는 나 자신의 태도로 돌려놓는다
아쉬운 점
- 문화사회학과 교회사, 신학을 오가는 논증이라 읽는 데 시간이 걸린다
- 미국 복음주의의 배경이 낯설면 일부 논의가 멀게 느껴질 수 있다
- 과거의 고백적 개신교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다소 향수가 느껴진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교회의 성장을 평가하는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사람
- 목회의 방향과 신학 공부의 의미를 돌아보고 싶은 목회자와 신학생
- 오래 신앙생활을 하면서 익숙해진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싶은 평신도
한 줄로 남기면
“교회를 비판하는 책인 줄 알았는데, 설교에서 내게 필요한 말만 고르던 습관부터 돌아보게 됐다.”
자주 묻는 질문
신학을 전공하지 않아도 읽을 수 있나?
이 책에서 말하는 신학의 실종은 무엇인가?
한국 교회를 생각하며 읽어도 의미가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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