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 때문에 찔렸다 - 메시아, 고난과 영광
김남준의 『메시아, 고난과 영광』을 읽고 쓴 서평. 이사야 53장 강해가 왜 하필 거룩과 속건제 이야기에서 시작하는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만족'이 인정에 목마른 나를 어떻게 찔렀는지, 그리고 대속과 헌신의 순서를 어디까지 지켜야 하는지 적었다.
책 정보
“십자가를 설명할 줄 아는 것과 십자가의 방식으로 사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먼 거리가 있었다.”
목차
이사야 53장은 구약에서 가장 많이 사랑받는 장 가운데 하나다. 『메시아, 고난과 영광』은 그 한 장만 붙들고 끝까지 파고든 강해서다. 표지에 적힌 대로 “성경의 위대한 장 설교 시리즈"의 첫 권이고, 부제도 담백하게 ‘이사야 53장 실천적 강해’다.
2000년에 처음 나온 책이라 요즘 김남준 목사의 글과 견주면 문장의 온도가 확실히 높다. 잘 정돈된 교과서를 읽는 맛이라기보다, 십자가의 의미에 사로잡힌 설교자가 회중을 향해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보라고 붙잡는 소리에 가깝다.
너무 익숙해져 버린 문장
책을 읽으며 새삼 놀란 건 이사야 53장이라는 본문 자체였다. 우리는 십자가 이야기를 너무 많이 들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같은 구절도 이제는 충격이 아니라, 예배당에서 매주 흘러가는 문장에 가깝다.
저자는 바로 그 익숙함을 흔든다. 2장 「질고와 멸시를 당하셨도다」에서 그는 믿음의 눈으로만 보이는 것이 있다고 말한다. 고운 모양도 풍채도 없어 흠모할 만한 것이 없어 보이는 메시아가 나를 위해 오신 구세주라는 사실, 그리고 죄인의 유일한 소망이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 데 있다는 사실. 여기서 그가 덧붙이는 문장이 마음에 오래 걸렸다. 단 한 번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본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아침마다 새롭고 늘 새로운 십자가의 감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번의 회심으로 계좌가 채워지고 그다음부터는 잔고를 꺼내 쓰며 사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읽었다. 나는 오래 믿었으니 십자가는 이미 아는 것이라고 여기던 태도가 여기서 한 번 걸렸다.
왜 하필 십자가였나
이 책이 좋았던 지점은 대속을 곧바로 설명하지 않고, 죄가 무엇인지부터 오래 붙들고 간다는 데 있다. 저자는 레위기의 속건제 규정을 길게 인용한다. 여호와의 성물에 대하여 그릇 범과하였거든 흠 없는 숫양을 속건제로 드리고 거기에 오분의 일을 더하라는, 언뜻 지루해 보이는 옛 규정이다.
그가 이 규정에서 끌어내는 결론은 단순하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못 박히셔야 했던 죄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거룩을 범한 죄였다는 것. 우리는 보통 죄를 사람 사이의 문제로 계산한다. 누구에게 상처를 줬는지, 어떤 손해를 끼쳤는지. 그런데 성경은 죄를 먼저 하나님을 향한 도전으로 본다. 그 방향이 바뀌면 십자가의 크기도 달라진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대목이 뒤쪽에 있다. 저자는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불의와 도전으로부터 자신의 거룩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성품"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사랑이라는 교리에 갇힌 분처럼 묘사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못을 박는다. 자신을 배반하고 거룩에 도전하는 무리 앞에서 그저 눈물만 흘리는 하나님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라기보다 진노를 피하고 싶은 인간이 희망하는 하나님의 모습일 뿐이라는 것이다.
읽다가 여백에 그대로 옮겨 적었다. 이 문단이 있어야 십자가가 설명된다. 죄가 가벼웠다면 십자가는 필요 없었을 테고, 사랑이 얕았다면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두고 떠나셨을 것이다. 십자가에는 인간의 절망과 하나님의 사랑이 한자리에 있다.
반역자를 향한 사랑
그래서 책이 붙든 “대속, 반역하는 인간을 향한 사랑"이라는 표현이 오래 남았다. 대속을 법정 용어로만 두면 값을 대신 치르셨다는 설명에서 끝난다. 그것도 핵심적인 진리이긴 하다. 다만 저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 계산의 뒤에 사랑이 있고, 그것도 순종하던 사람을 향한 사랑이 아니라 도망치던 자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로마서 5장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돌아보면 나는 은혜를 자주 보상처럼 다뤘다. 기도를 오래 한 날은 하나님과 가까워진 것 같고, 말씀을 못 편 날은 멀어진 것 같았다. 내 성적표에 따라 하나님의 호의가 오르내린다고 여긴 셈이다. 그런데 십자가 앞에서는 그 계산이 성립하지 않는다. 내가 가까이 갈 만해서 그분이 죽으신 것이 아니라, 돌아올 힘조차 없었기 때문에 그분이 먼저 오셨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만족
또 하나 붙잡아 둔 표현은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만족"이다. 164쪽에서 저자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의 빛 안에서 자유와 평화를 누린 사람들이 고난을 몰랐던 게 아니라고 쓴다. 오히려 그 만족을 알았기 때문에 수많은 고난 앞에서 침묵과 인종의 삶을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곧장 이사야의 문장을 붙인다.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아니하였고,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잠잠하였다는 구절.
이 대목은 꽤 불편했다. 나는 신앙생활에서도 남의 평가에 흔들린다. 누가 내 수고를 알아주면 힘이 나고, 아무도 모르면 ‘내가 이걸 왜 하고 있지’ 하는 생각이 금세 올라온다. 봉사조차 하나님을 위한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인정을 기다릴 때가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침묵은 성격이 온유했다는 이야기로 읽히지 않았다.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했던 사람만 가질 수 있는 자유처럼 보였다.
책을 덮고 며칠간 사소한 실험을 했다. 작은 일 하나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해봤다. 누가 알아주는지 확인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평가를 기다리는 기척이 올라올 때마다 ‘나는 지금 누구 앞에서 살고 있나’를 물었다. 별것 아닌 실천인데 쉽지 않았다. 십자가를 안다는 것과 십자가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긴 거리가 있었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책이 대속을 다 말한 뒤 그리스도인의 일상으로 넘어가는 흐름이 좋았다. 복음은 천국행 티켓에서 끝나지 않는다. 구원받은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사는지를 묻는다. 216쪽에 그 전환이 선명하게 나온다. 주님은 죽으셨고, 그 대속의 효력이 미쳐 이미 구원받기로 작정된 사람들을 거두기 위해 우리를 먼저 부르셨다는 것이다.
거기서 저자는 갑자기 아주 구체적인 장면을 꺼낸다. 경비원의 눈을 피해 아파트 문을 두드리거나, 사나운 개가 짖는 집 초인종을 누를 때, 여러분은 주님을 대신해 거기 서 있는 것이라고.
전도가 잘 안 될 때 낙심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정리된다. 사람을 구원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를 구원하실지 드러내는 도구로 우리를 부르셨을 뿐이라는 것. 성과에 매인 마음이 한 번 헐거워지는 문장이었다.
조금은 경계하며 읽은 지점
다만 읽으면서 거리를 두고 본 대목도 있다. 은혜의 감격을 강조하다 보면 신앙의 진실성을 감정의 뜨거움으로 재게 될 위험이 있다. 십자가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나야 진짜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격하게 반응하고, 어떤 사람은 조용하지만 긴 세월 성실하게 걸어간다. 감격은 귀하지만 감정의 세기가 곧 믿음의 눈금은 아니다.
대속과 헌신을 강하게 묶을 때도 마찬가지다. 자칫 “주님이 이렇게까지 하셨으니 너도 목숨 걸고 살아야 한다"는 압박으로 읽힐 수 있다. 실제로 책에는 ‘일사각오의 신앙’ 같은 센 표현도 나온다. 이 강조에 힘이 있다는 건 분명하다. 소비적이고 무기력해진 신앙을 흔들어 깨우니까. 그래도 순서는 늘 지켜져야 한다고 본다. 헌신해서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받았기 때문에 헌신한다. 순종은 은혜의 대가가 아니라 결과다. 이 순서를 놓치면 자유를 주는 복음이 또 하나의 무거운 의무로 바뀐다.
함께 읽으면 좋은 책
그런 면에서 존 스토트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나란히 읽으면 균형이 잡힌다. 스토트가 십자가의 성경적·신학적 의미를 정교하게 해부한다면, 이 책은 그 십자가가 신자의 마음과 생활을 어떻게 흔들어야 하는지를 더 집요하게 묻는다. 한쪽이 설계도를 펼쳐 보인다면, 다른 한쪽은 그 설계도 앞에 독자를 세워 놓고 “그러면 너는 어떻게 살 것이냐"고 되묻는 느낌이다.
밑줄 그은 문장들
“대속, 반역하는 인간을 향한 사랑.”
이 짧은 말에 복음의 역설이 거의 다 들어 있다. 사랑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 반역자를 사랑하셨다는 사실.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완전한 만족.”
칭찬과 인정에 목말라하는 나를 돌아보게 한 표현이다. 신앙의 자유는 결국 하나님 한 분으로 충분해지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그리스도가 메시아이심을 안 사람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훌륭한 스승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분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로, 내 죄를 지신 메시아로 아는 사람이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개인적으로 가장 오래 남는 문장이다. 십자가는 과거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그 사건은 오늘 내가 돈을 쓰고 사람을 대하고 일하고 용서하고 욕심을 내려놓는 방식까지 건드린다.
결국 남은 질문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십자가를 멀찍이 있는 교리로 두지 않는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이사야 53장의 메시아를 설명하는 듯하다가, 어느 순간 독자인 내가 그 십자가 앞에 서 있게 된다. “그가 찔렸다"에서 끝나지 않고 “그가 나 때문에 찔렸다"로, 다시 “그러면 나는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로 질문이 옮겨간다. 저자가 216쪽 끝에 밑줄처럼 눌러 둔 문장도 결국 같은 자리를 가리킨다. 교회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안다면, 그 앎은 반드시 살아가는 방식으로 흘러나온다는 것.
나는 십자가를 이미 잘 안다고 여기던 사람에게 오히려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교회에 막 나오기 시작한 사람에게는 다소 세고 무거울 수 있다. 하지만 복음을 오래 들었고 대속이나 칭의 같은 단어가 너무 익숙해져 더는 마음을 건드리지 않는 사람이라면, 특히 설교자나 신학생, 혹은 신앙이 어느새 지식과 습관으로만 남았다고 느끼는 사람이라면 천천히 읽어볼 만하다.
책을 덮고 내게 남은 질문은 아주 단순했다.
나는 정말 십자가를 알고 있는가.
십자가 교리를 설명할 수 있느냐는 물음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셨다는 사실 때문에 내 삶의 방향이 실제로 달라지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말하기는 쉬운데 대답하기는 어렵다.
아마 저자가 이 긴 강해 내내 독자에게 끝까지 묻고 싶었던 것도 그것이었을 테다. 메시아의 고난을 보았다면, 이제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는가.
책은 덮었는데 그 질문은 좀처럼 덮이지 않았다.
총평
좋았던 점
- 이사야 53장 한 장만 붙들고 끝까지 파고든다 — 집요함이 이 책의 정체성이다
- 대속을 법정 용어로만 두지 않고 그 배후의 사랑까지 밀고 간다
- 속건제와 하나님의 거룩에서 출발해 ‘왜 하필 십자가였나’를 정면으로 다룬다
- 교리 설명에서 멈추지 않고 ‘그러면 너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로 독자를 세운다
아쉬운 점
- 2000년에 나온 강해라 문장의 온도가 높다. 차분한 논증을 기대하면 다소 뜨겁게 읽힌다
- 감격을 강조하는 대목이 많아, 자칫 감정의 세기를 믿음의 척도로 오해할 여지가 있다
- ‘일사각오’ 같은 표현은 힘이 있지만 부담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대속·칭의·은혜 같은 단어가 너무 익숙해져 더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사람
- 이사야 53장으로 설교를 준비하는 설교자와 신학생
- 오래 교회를 다녔는데 신앙이 지식과 습관으로만 남았다고 느끼는 사람
- 사람의 인정에 신앙생활까지 흔들린 적이 있는 사람
한 줄로 남기면
“십자가를 설명할 줄 아는 것과 십자가의 방식으로 사는 것 사이에는, 생각보다 먼 거리가 있었다.”
자주 묻는 질문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한 사람이 읽어도 될까?
설교집인가, 신학서인가?
함께 읽으면 좋은 책이 있나?
이사야 53장을 미리 읽고 가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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