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은 왜 이성의 적이 되었을까
프랜시스 쉐퍼의 『이성에서의 도피』를 읽고 쓴 서평. 위층과 아래층으로 갈라진 현대인의 정신, '완전히 알지 못해도 참되게 알 수 있다'는 균형, 그리고 아퀴나스와 키르케고르 해석에서 느낀 아쉬움까지 함께 적었다.
책 정보
“위층에 신앙을, 아래층에 현실을 따로 넣어 두고 살아온 사람에게 다시 계단을 놓아 보라고 권하는 책.”
목차
반틸을 읽다 보면 자연히 쉐퍼가 궁금해진다.
쉐퍼가 웨스트민스터에서 반틸에게 배웠다는 사실도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반틸의 변증적 사고가 제자에게 어떤 모양으로 흘러갔을까가 궁금했다. 반틸의 영향이 그만큼 대단했던 것처럼, 쉐퍼는 마치 반틸의 열매인 양 현대 사상의 흐름에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집어 든 책이 『이성에서의 도피』다.
표지부터 이 책의 요지를 다 말해 준다. 눈을 가린 채 웅크린 인물이 현이 끊어진 악기를 안고 있다. 소리를 낼 수 없는 악기를 붙들고 앉은 사람. 쉐퍼가 진단하는 현대인의 모습이 딱 그렇다.
얇은 책에 담긴 넓은 지도
1968년에 나온 이 책은 기독교 철학·변증서다. 분량은 짧지만 다루는 범위는 결코 작지 않다.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에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을 거쳐 칸트, 헤겔, 키르케고르, 사르트르까지 서양 사상의 흐름을 빠르게 훑는다. 피카소와 달리 같은 예술가까지 불러내니, 얇은 한 권 안에 철학사와 미술사, 신학과 문화비평이 한꺼번에 들어 있는 셈이다.
쉐퍼는 스위스 라브리 공동체에서 젊은이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질문을 직접 들었던 목회자이자 변증가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글에서는 강의실의 냉정한 문체보다 “도대체 현대인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라고 다급하게 묻는 목소리가 들린다. 그는 철학을 지식인의 취미로 보지 않는다. 한 시대가 무엇을 진리라고 믿느냐에 따라 예술과 윤리, 정치, 사랑, 심지어 한 개인이 절망하는 방식까지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위층과 아래층, 그리고 없는 계단
책의 중심에는 ‘위층과 아래층’이라는 독특한 구도가 있다. 중세에는 은총과 자연이 구분되었고, 근대에 들어서면서 그 자리에 자유와 자연이 놓였다. 위층에는 의미, 목적, 가치, 신앙, 자유가 있고 아래층에는 이성, 과학, 사실, 필연이 있다.
문제는 두 영역이 갈라졌다는 데 있다.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아래층에서는 인간이 우연히 생겨난 물질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도, 위층에서는 사랑과 존엄과 희망을 붙잡으려 한다. 그러나 둘을 이어 주는 계단이 없다.
책 중간에 실린 앵그르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죽음」은 이 구도를 시각적으로 붙들어 주는 장면이다. 프랑수아 1세가 임종하는 다 빈치를 품에 안고 있는 그림인데, 쉐퍼는 이 시기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교차하는 지점으로 읽는다. 같은 시대에 두 개의 대답이 나왔다는 것이다. 하나는 인간의 자율성을 위층까지 밀어 올리는 길, 다른 하나는 오직 하나님만이 자율적이시라고 고백하는 길. 도판 설명 아래 그어 둔 밑줄을 다시 보니, 쉐퍼가 이 그림을 왜 여기 놓았는지 알 것 같았다.
쉐퍼가 묘사하는 현대인은 참 기묘하다. 머리로는 “우주에는 목적이 없다"고 말하면서 삶에서는 자녀를 사랑하고 정의를 요구하며 배신에 분노한다. 모든 가치가 상대적이라고 주장하다가도 자신이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 절대적인 정의를 찾는다. 세계관과 실제 생활이 충돌하는 것이다. 쉐퍼는 이 모순을 조롱하기보다 인간 안에 지워지지 않은 하나님의 형상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 사람은 허무주의를 말할 수는 있어도 끝까지 허무주의자로 살아갈 수는 없다.
절망선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
헤겔을 다루는 대목에서 밑줄을 꽤 그었다. 쉐퍼는 헤겔이 진리로서의 진리를 지우고 그 자리에 ‘종합’을 앉혔다고 본다. 흥미로운 건 그가 이 변화를 승리가 아니라 절망의 산물로 읽는다는 점이다. 합리주의적 인간이 원해서 이렇게 된 게 아니라, 수 세기 동안 합리주의적 사고가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데서 온 절망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 선택이 이루어졌다. 합리성을 희생시키고 합리주의를 고수하는 선택이다. 이 문장이 이 책 전체를 압축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합리성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자율성만은 끝까지 붙든다는 것. 이성을 버린 게 이성이 싫어서가 아니라, 자기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자리를 내려놓기 싫어서라는 진단이다.
이 진단이 60년대 문화로 이어지는 장면은 지금 읽어도 서늘하다. 쉐퍼는 올더스 헉슬리를 예로 든다. 헉슬리는 ‘제일의 체험’이라는 말을 쓰면서 그 체험을 얻기 위해 약물 사용을 주장했다. 아래층에서는 삶이 무의미하니, 합리성의 세계와는 아예 무관한 신비한 경험을 위층에서 따로 구해 보겠다는 것이다.
쉐퍼는 자기가 LSD 환각제를 사용하는 지성인들을 여럿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데 거의 모두가 헉슬리의 이론과 관계가 있더라고 담담하게 적는다. 라브리에서 실제로 사람을 만나 온 사람만 쓸 수 있는 문장이다. 철학사의 한 페이지가 어떻게 한 사람의 팔뚝에 주삿바늘로 내려앉는지를 그는 직접 봤다.
여기서 하나 짚고 갈 게 있다. 쉐퍼가 문제 삼는 건 ‘체험’이 아니라 ‘이성과 끊어진 체험’이다. 신비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아래층이 무의미해졌기 때문에 위층으로 도망칠 수밖에 없게 된 구조를 문제 삼는다. 지금으로 치면 약물 대신 다른 이름들이 그 자리에 들어와 있을 뿐이다. 설명할 수 없어도 좋으니 강렬하게 느끼기만 하면 된다는 태도, 근거는 묻지 말고 감동만 달라는 요구. 형태만 바뀌었지 구조는 그대로다.
완전히 알지 못해도 참되게 알 수 있다
읽는 동안 붙잡게 된 문장들을 정리하면 이렇다.
“자연이 자율성을 얻는 순간, 자연은 은총을 먹어 치우기 시작한다.”
“절망의 선 아래에서는 인간에게 의미도 목적도 중요성도 남지 않는다.”
“성경에 근거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완전히 알지는 못해도 참되게 알 수 있다.”
“기독교의 신앙은 비이성적인 도약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응답이다.”
특히 “완전히 알지 못해도 참되게 알 수 있다"는 생각이 오래 남았다. 우리는 흔히 전부 알 수 없다면 아무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여긴다. 그러나 어린아이가 부모를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부모를 전혀 모르는 것은 아니다. 유한한 지식과 거짓된 지식은 같은 것이 아니다. 쉐퍼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진리 자체를 포기하지 않는다. 이 균형이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몸과 영혼, 그리고 두 영역의 주인
쉐퍼가 위층/아래층 도식을 꺼내는 이유는 결국 이 갈라짐이 성경적이지 않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다. 그는 영혼을 위층에 두고 육체를 아래층에 밀어 넣는 태도가 플라톤의 것이지 성경의 것이 아니라고 못 박는다.
종교개혁이 회복한 견해는 플라톤주의자의 것도, 인본주의자의 것도 아니었다. 하나님이 전인을 만드셨으므로 전인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 타락이 역사 속 시공간에서 실제로 일어나 전인에게 영향을 미쳤다는 것,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에 근거해 전인의 구속이 이루어진다는 것. 그래서 그리스도는 양 영역을 모두 다스리는 주가 되신다.
이 페이지를 읽으면서, 쉐퍼가 앵글로색슨계 기독교보다 네덜란드에서 ‘문화를 다스리시는 주 되심(Lordship)‘이 더 강조되었다고 짚는 부분이 눈에 걸렸다. 카이퍼로 이어지는 전통을 염두에 둔 문장일 텐데, 이 한 줄이 이 책의 정체를 잘 보여 준다. 쉐퍼가 하려는 건 위층을 지키는 방어전이 아니라, 아래층까지 되찾아 오는 일이다.
내가 만들어 둔 두 개의 방
나 역시 신앙을 위층에만 가둔 적이 많았다. 주일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고백하면서 월요일이 되면 모든 일을 우연과 경쟁의 논리로 판단했다. 기도할 때는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하지만 일터에서는 성과와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기도 했다. 입으로는 신앙과 삶의 통합을 강조하면서 실제로는 예배와 업무, 성경과 기술, 교회와 사회를 각각 다른 방에 넣어 두었던 셈이다.
이 책을 읽은 뒤에는 어떤 판단을 내릴 때 “지금 내가 사실과 가치를 분리하고 있지는 않은가?“라고 묻게 되었다. 개발과 과학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지만, 무엇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지까지 스스로 결정해 주지는 못한다. 효율이 높다고 해서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며,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해서 언제나 정당한 것도 아니다. 인공지능이나 생명공학처럼 영향력이 큰 기술일수록 아래층의 능력과 위층의 윤리를 다시 연결해야 한다. 이 점에서 쉐퍼의 문제의식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 오히려 더 절실하게 느껴진다.
그대로 받기 어려운 대목
다만 그의 역사 해석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쉐퍼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인간 이성에 자율적인 영역을 허용했고, 그 틈이 커지면서 르네상스와 근대의 세속주의가 등장했다고 설명한다. 큰 흐름을 파악하게 해 주는 강력한 도식이지만, 수백 년의 사상사를 한 줄의 인과관계로 묶는 데는 무리가 있다. 아퀴나스는 이성을 하나님에게서 독립시키려 했던 사상가라기보다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추구했던 신학자에 가깝다. 르네상스 역시 단순한 인간 자율성의 반란으로만 볼 수 없다.
키르케고르를 비이성적 도약의 출발점으로 다루는 부분도 다소 거칠다. 키르케고르가 객관적 사유만으로는 신앙의 실존적 결단을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가 논리 자체를 폐기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쉐퍼의 지도는 방향을 보여 주는 데는 탁월하지만 실제 지형의 골짜기와 굴곡까지 정확히 담아내지는 못한다. 그래서 이 책은 완성된 철학사 교과서가 아니라 현대 문명의 균열을 발견하게 하는 진단서로 읽는 편이 좋다.
C. S. 루이스의 『인간 폐지』가 객관적 가치가 사라진 교육의 종착점을 보여 준다면, 『이성에서의 도피』는 그런 상황이 어떤 사상적 경로를 통해 형성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루이스가 문학적 비유와 풍자로 독자를 설득한다면 쉐퍼는 커다란 사상 지도를 펼쳐 놓고 문명의 이동 경로를 손가락으로 짚는다. 두 저자 모두 이성을 반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성과 가치를 분리한 세계가 결국 인간다운 이성마저 파괴한다고 경고한다.
도약이 아니라 응답
쉐퍼가 말하는 기독교는 증거가 필요 없는 맹목적 낙관주의가 아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실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났다는 역사적 주장 위에 서 있다. 그러므로 믿음은 아래층의 절망을 피해 위층으로 뛰어오르는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현실 전체를 설명하는 진리 주장이어야 한다. 교회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려면 “그냥 믿어 보라"고 말하기 전에 상대가 어떤 전제 위에서 살아가는지 듣고, 그 세계관과 실제 삶 사이의 갈라진 틈을 함께 살펴야 한다.
여기서 반틸의 그림자가 선명하게 보인다. 상대의 전제를 먼저 듣고, 그 전제 위에 서서 살아 보면 삶이 감당되지 않는다는 걸 함께 확인하는 방식. 반틸이 논리의 언어로 했던 일을 쉐퍼는 라브리 거실의 언어로 했다. 학문적 정교함은 반틸이 훨씬 앞서지만, 그 사고를 실제 사람들의 절망에 갖다 대 본 사람은 쉐퍼였다.
『이성에서의 도피』는 친절한 입문서는 아니다. 인물과 사조가 빠르게 등장해 철학에 익숙하지 않으면 몇 번씩 앞장을 다시 펼치게 된다. 그럼에도 이 책은 짧은 분량으로 긴 질문을 남긴다.
나는 내가 믿는 대로 생각하고 있는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는가. 신앙을 감정과 위로의 영역에만 가두고 현실은 세속적 계산에 맡기고 있지 않은가.
철학적 세부 묘사의 정확성보다 현대인의 분열된 정신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 신앙과 학문을 함께 붙들고 싶은 사람, 복음을 감정적 위안이 아닌 통합된 세계관으로 고민하고 싶은 사람에게 권하고 싶다. 모든 주장에 동의하지 않아도 괜찮다. 오히려 반론하며 읽을 때 이 책은 더 유익하다. 쉐퍼가 독자에게 요구하는 것은 자기 도식을 무조건 받아들이라는 복종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익숙해서 알아차리지 못했던 삶의 두 층 사이에 다시 계단을 놓아 보라는 초대이기 때문이다.
총평
좋았던 점
- 아퀴나스에서 사르트르까지 서양 사상의 흐름을 얇은 한 권에 지도처럼 펼쳐 놓는다
- ‘위층과 아래층’이라는 단순한 도식 하나로 철학·예술·신학·문화를 한꺼번에 읽어 낸다
- “완전히 알지는 못해도 참되게 알 수 있다"는 균형이 인식의 겸손과 진리 주장을 동시에 붙든다
- 강의실 문체가 아니라 라브리에서 젊은이들의 질문을 직접 받아 낸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린다
아쉬운 점
- 수백 년의 사상사를 한 줄의 인과관계로 묶는 도식이 지나치게 단순하다
- 아퀴나스를 세속화의 출발점으로 지목하는 해석은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 키르케고르를 ‘비이성적 도약’의 시작으로만 다루는 대목이 거칠다
- 인물과 사조가 빠르게 스쳐 지나가서 철학 배경이 없으면 앞장을 몇 번씩 되짚게 된다
이런 분께 권합니다
- 신앙과 일, 예배와 업무가 각각 다른 방에 들어가 있다고 느끼는 사람
- 현대인의 분열된 정신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큰 지도로 보고 싶은 사람
- 복음을 감정적 위안이 아니라 현실 전체를 설명하는 세계관으로 붙들고 싶은 사람
- 기술과 과학을 다루면서 ‘무엇을 위해’라는 질문을 놓치고 싶지 않은 개발자·연구자
한 줄로 남기면
“위층에 신앙을, 아래층에 현실을 따로 넣어 두고 살아온 사람에게 다시 계단을 놓아 보라고 권하는 책.”
자주 묻는 질문
철학 배경이 없어도 읽을 수 있나?
『인간 폐지』와 무엇이 다른가?
쉐퍼의 역사 해석을 그대로 믿어도 되나?
'위층과 아래층'이 정확히 무슨 뜻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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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은 생각을 멈추는 결론이 아니라, 더 정직하고 더 겸손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는 자리다.




